자유게시판
 
 
" 학도넷 운동에 대해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개인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글, 상업적인 광고 문안, 음란한 내용의 게시물은 관리자 직권으로 삭제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5805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펴낸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를 독자기증으로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작은도서관 등 50곳에 증정합니다.
사무처
2018.12.12.
47



<<독자 기증 책증정 행사>>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펴낸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를 

독자기증으로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작은도서관 등 50곳에  증정합니다.

 
학도넷 메일로 개인정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도서관명, 주소, 담당자이름, 연락처_택배발송을 위한 기초자료)

===============================================================================

진행 일시 : 2018년 12월 7일

진행 도서 :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50권

진행 방법 :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작은도서관 50곳

도서 발송 : 이벤트 마감후 출판사에서 발송합니다.

 -----------------------------------------------------------------------------------------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지은이 : 정민

발행일 : 20181119

분 야 : 역사 일반

판 형 : 135*200(무선)

ISBN : 978-89-6735-556-2 03900

쪽 수 : 436

: 22,000

책임편집 : 이은혜(031-955-8897 | 010-3322-1976)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실학자 이덕리

동다기상두지행간 속에서

몸집 큰 거인의 면모가 점점 윤곽을 갖춘다

 

이덕리를 추적한 지 10여 년……

역사에서 흔적이 모조리 지워진 한 패망한 가문의 후손

그의 저술은 다산의 이름으로 바뀌어 후대에 전해졌고

그의 자취를 쫓던 이들은 제때 이름을 돌려주지 못했다

무려 200여 년 만에 밝혀진 저간의 사정과 실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숨 가쁜 고증 추적기!

 

10여 년간의 발굴담, 이덕리를 추적하다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는 한 학자의 고문서 발굴에 얽힌 10여 년간의 추적담이자 고문서 저자 이덕리李德履(1725~1797)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학자적 면모를 밝히는 책이다. 문서 발굴의 기회는 우연과 운명이라는 외투를 걸친 채 저자에게 찾아온다. 그건 뜻밖의 횡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 어리석은 실수를 일으키고 다시 만회할 기회까지 안겨주는 스펙터클의 현장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발굴에서 집필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고, 이로써 조선 후기 실학의 한 귀퉁이를 새롭게 복원해내는 실적도 이뤘다. 부수적인 것이지만, 그 안에 얽힌 감정을 들여다보자면 흥분과 죄책감, 의무감, 감탄, 미안함과 고마움이 서려 있었다.

때는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탈고하는 과정에서 다산의 기운을 전해 받고자 강진에 내려간다. 내심 떡차에 관한 다산 간찰의 실물도 봤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이처럼 공부하는 학자의 의욕을 헤아려주면 참 좋겠지만, 간찰 소장자는 뜻밖에도 자료 일체를 공개하려들지 않았다. 여러 시간을 달려 간 길이라 그대로 접을 순 없었다. 중간에 다리를 놔줄 인물이 마침 강진에 있어 저자는 어렵사리 소장자 노인의 방안에 몇 뼘 간격을 두고 마주앉게 된다. 그리고 이 첫 만남은 두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실학 저술의 발굴로 이어진다. 바로 동다기東茶記상두지桑土志.

그동안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두 저술의 집필자는 다산 정약용이라고 말해왔다. 그 오인의 역사는 길다. 글 맨 끝에 약간의 힌트만 남긴 채 거의 익명으로 전해진 데다 저술의 중량감과 존재감이 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까지도 다산의 저술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제기되지 않았다. 이에 저자 정민 교수는 이 책의 주인공을 무덤 속에서 불러내 그 이름값을 되찾아주자고 결심하게 된다. 220년간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원저자의 한도 달래주리라 생각하며.

자료를 접하고, 수소문하고, 해독하고, 글쓴이에 관한 정보를 뒤적거리면서 들뜨긴 했으나 신중히 접근하려 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중간에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애초에 전의리全義李라고 적힌 책의 집필자가 이덕리라는 것까지는 여러 터널을 통과하면서 밝혀냈지만, 동다기상두지를 쓴 이덕리보다 세 살 연하인, 1728년생의 동명이인 이덕리가 저술의 주인공이라며 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이 일은 1725년생인 이덕리 입장에서 보면 통탄할 만한 것이었다. 지난 220년간 세상의 빛을 한 번도 받지 못했고 후손들 역시 자기 선조의 발자취를 전혀 모르던 와중인데, 논문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죄스런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전의 이씨 23세 청강공파 자 항렬 계보에는 비슷한 시기에 세 명의 서로 다른 이덕리가 존재했다. 게다가 어찌된 셈인지 세 사람 모두 족보상에서 이덕리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하지만 발굴자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던 게, 이덕리는 그 형이 대역죄인인 까닭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20여 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자신 세상에 절대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글을 썼고, 책 말미에 희미한 흔적만 남겼다. 집안 후손들도 미처 몰랐던 사실인 데다, 후대 학자들 역시 그 덫에 걸려 헤매고, 오해하고, 다시 바로잡는 해프닝까지 벌어진 것이다.

길디긴 발굴 과정이었지만, 이덕리는 뛰어난 실학자적 면모로 인해 충분히 양지에 드러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상두지가 국방 관련 제안서라면 동다기는 차 전문서로서의 차에 관한 세부 내용은 물론이고 국방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재원이 될 만한 방책을 내놓기도 한다. 이 두 저술로 인해 이덕리는 18세기 지성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이덕리는 누구인가

 

동다기의 실제 집필자를 추적하는 실마리의 첫발은 우연한 기회에 떼어졌다. 저자는 초의의 동다송을 읽던 중 제37~40구 아래에 달린 주석에서 동다기에 이르기를이란 구절에 시선이 붙들렸다. “이상하다. 이 구절은 얼마 전 강진에서 이효천 노인이 보여주었던 강심江心이란 책에 실린 기다記茶의 내용과 같은데…….” 마침 노인에게서 자료를 빌려온 터라 곧장 대조를 해보니 기다가 곧 동다기였다. 둘은 한 글자의 오차도 없이 내용이 똑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다산의 또 다른 자료가 세상 빛을 보게 되는 것인가.’ 당시의 상식으로 동다기의 집필자는 다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갖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 정민 교수는 전혀 뜻밖의 인물, 문중에서조차 그 존재를 몰랐던 이덕리란 인물이 이 책의 실제 저자임을 알게 된다.

 

강심기다끝에 필사자인 이시헌은 저자인 이덕리李德履옥주적중沃州謫中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썼다. 이덕리가 죄를 지어 진도에 유배 와 있으면서 지었다는 것이다. 죄인 신분이었으므로 이덕리는 자신의 저서에 이름 대신 본관만 밝혔고, 이것이 필사되어 유통되면서 전의리全義李 란 해괴한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시헌이 강심에서 무심코 한 줄의 추기를 남겨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저자를 끝내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본문에서)

 

이덕리는 철저히 왜 잊히려 했고 잊힐 수밖에 없었을까. 저술은 버젓이 남아 전하는데, 왜 책표지에 자기 이름 새기기를 거부했을까. 발단은 그의 형 이덕사李德師(1721~1776)에게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즉위일에 윤음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해석하기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를 예우하겠다는 뜻으로도 읽혔고, 정반대로 사도세자 추숭 논의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로도 읽혔다. 이덕사는 사도세자를 예우한다는 쪽으로 해석해 사도세자 추숭을 건의하는 방향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이것은 엄청난 광풍을 일으켰다. 노론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정조는 이덕사의 상소문이 올라오자 격노했고, 곧장 체포해 이튿날 능지처참에 처했다.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입어 당시 52세였던 동생 이덕리 역시 진도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들 형제는 명문의 후예로 문명이 높아 당대의 선집에 이름을 올렸던 문인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20년의 세월, 이덕리는 71세가 되기까지 유배지의 민가 골방에 틀어박혀 이름을 숨긴 채 강심상두지집필에 몰두했다. 이후 다시 영암으로 이배되었다가 73세의 나이로 이름도 자취도 없이 세상을 떴다.

저자가 자료를 발굴하면서 새롭게 확인한 이덕리는 그저 동다기의 집필자로만 기억될 인물이 아니었다. 변방의 둔전 경영과 축성 및 도로와 수로 운영, 각종 화포와 수레 제도의 적용을 꼼꼼히 정리한 것이 상두지라면, 농한기 유휴 인력을 활용한 차 생산과 국가 전매를 통해 엄청난 국부를 창출하자고 외친 것이 기다. 게다가 삭제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펴낸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를 독자기증 마감되었습니다. 관심 감사드립니다.
댓글달기
이름 패스워드  도배방지 이 숫자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