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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의 진실캐기
사무국
2006.04.04.
2153
제주4.3의 진실캐기


하산인 /강요배



4월 3일, 오늘은 제주역사를 수난과 항쟁으로 또렷이 새겨진지 58년이 되는 비운의 날이다. 지천에 떠돌고 있는 4·3영령들의 넋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 슬픈 역사에 대한 참담한 심정은 여전하다.

지난 25년 동안 4·3진상규명과 희생자 조사,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길거리에 나서 외쳐보기도 했고, 산천을 떠돌며 원귀들을 찾아 헤매기 했지만 아직까지도 섬은 잠들지 않은 채 눈 부릅뜨고 이 시대를 노려보고 있어서다. 변방에 우짖는 섬이라는 표현이 지금도 유효한 듯하다.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이 공식사과 했지만 제주도민들의 아픔은 여전히 씻어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4·3진상규명 노력도 그 진실성이 의심된다. 명예회복은 말뿐이다. 진상규명 없이 이루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철저한 진상조사를 거쳐 명예회복의 디딤돌이 돼야 한다. 피해보상이라고 주는 거마비는 섬 주민의 가슴을 더 찢어 놓았다.

제주4·3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 진행과정을 짚어보면서 숨죽여 왔던 4·3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가 본다. 이 접근은 '수난사적 시각'을 바탕에 깔고 아픈 역사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무장폭동인지 민중항쟁인지를 가려낼 것이다.(아래의 4.3 전개과정 부분은 관련 연구자료를 재구성하고 몇가지 의견을 반영했다.)

3·1 시위와 미군정의 경찰의 총격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한 점 산으로 솟은 탐라. 척박한 자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적 전통과 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침략자, 수탈자를 향한 저항 정신이 면면히 흐르는 섬. 


   ▲ 해방 /강요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제주도민은 자치행정기구인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미군정도 인정했듯이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온건정책의 실시, 도민 생존권과 치안의 확보를 위한 일제 잔류군과의 투쟁 등으로 도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미군정은 점차 이를 부인하고 서서히 탄압의 고삐를 쥐어갔다.

제주 4·3의 도화선은 3·1시위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내의 제주읍을 비롯한 각 면에서 연인원 약 10만 명이 참가하여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촉구하는 3·1독립운동기념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제주읍의 경우 오전 9시를 전후해 오현중 교정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 온 약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이 3, I기념대회를 개최한 다음 본 대회장인 제주시 북국민학교를 향하여 행진해 나갔고, 이를 미군정이 저지하자 "미군은 이 땅에서 당장 물러가라"는 등의 반미구호를 외치면서 이를 돌파했다.

오전 11시 경 북국민학교에 집결한 약 3만 명의 군중은 '3.1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의 주최로 "3·1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결의하는 대회를 성황리에 열었고, 이어 오후 2시 경 학교와 마을별로 나누어 가두 시위에 돌입하면서 해산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 50분 경, 관덕정 앞의 도민들이 거의 해산했을 때, 한 기마 경관의 말굽에 어린 소년이 채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마 경관이 아무런 응급조치 없이 유유히 경찰서 쪽으로 나아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투석을 시작했고 이어 총소리가 터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총성 직전, 관덕정 광장에 시위대가 없었고 100∼150명의 관람 군중들만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때 한 소년이 기마 경관의 발굽에 치이는 소동에 이어진 발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등 뒤에 총탄을 맞았으며, 또한 관덕정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미군정 경찰은 명백하게 살인을 감행한 것이다. 6명이 피살되고 8명이 부상당했다.

제주도민의 항의 총파업과 미군정의 탄압
미군정의 학살에 대응하여 제주 도민은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구호 아래 각 직장에 '31공동투쟁위원회' 및 시민 사이에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주도 전역에 걸쳐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 총파업은 3월 18일까지 진행됐는데, 여기에는 총파업 인원 40,852명, 행정기관 23개, 중등학교 13개, 초등학교 92개, 통신기관 8개, 교통기관 7개, 금융기관 8개, 실업단체, 공장, 회사 15개 등 전도의 각 기관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애월, 모슬포, 중문지서 등의 경찰관까지 동조하는 바람에 섬 전역의 질서가 완전히 마비될 정도로 대중적인 호소력과 참여도를 보여주는 반미항쟁이었다.


서북청년단 입도 /강요배

제주 도민의 저항에 직면한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4일 조병옥을 위시하여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을 분쇄하였고, 곧이어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 간부와 직장별 주동자 검거에 나서 지속적으로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 등은 "제주도는 주민의 90% 이상이 빨갱이"라고 악의에 찬 선전을 계속했다. 서북 청년단원에게는 "제주도는 작은 모스크바"라고 집중적으로 교육했다. 더불어 미군정은 도 군정 수뇌부를 모두 강성 인물로 교체하여 탄압의 고삐를 바짝 죄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라면 생리적 거부감에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했다.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성향을 이용, '사상이 불손한 지역' 에 이 세력을 파견하여 민중들을 공격하는 하수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봉급 없는 경찰 보조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갈취와 약탈, 폭행을 무수히 진행했다. 이들은 제주 도민의 애국심을 심사한다면서 태극기와 이승만 초상화를 강매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가 하면, 죄 없는 남자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애인에게 접근하여 석방을 핑계로 강간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했다. 이럼으로써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서청단원과의 정략 결혼에 응할 수밖에 없는 처녀들도 있었다.

총파업의 종식과 분노하는 민심, 그리고 입산
미국이 지휘하는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반공단체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전도에 걸친 총파업은 마침내 3월 18일 종식됐다. 그러나 총파업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제주 도민을 압살하기 위한 강경책이 날로 도를 더해가자 마침내 도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위의 수단을 강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어김없이 보복의 칼날을 휘둘렀다.

한편 미군정의 식민지 시대 못지 않은 곡물 공출 강요 또한 도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미군정은 제주도가 1946년과 1947년 연 2년째의 혹독한 흉년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역 사정을 무시하고 곡물의 공출을 강요함으로써 도민들로 하여금 "미군정이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했다

따라서 제주 도민은 중산간 부락을 중심으로 미군정의 이러한 공출 강요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제주도에서의 공출 실적율은 전국에서 가장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3·1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 검속하고 사상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했다. 이 결과 재개된 검거 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방어적인 자위수단으로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 것을 시발로 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경찰, 군에의 피난 입대와 해외 도피도 빈발하게 됐다.

'한국문제'의 UN 이관
한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한반도 내 시행이 불가능해지자 미국은 마침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를 호도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책략으로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했다.

이에 따라 내려진 UN에서의 UN감시하의 남, 북한 총선거의 실시' 라는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결국 미국이 한반도의 북쪽을 제외한 지역에 강력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여 현상유지를 모색하고, 이것에 근거하여 사회주의권의 동북아시아 지역으로의 확산을 적극 저지, 봉쇄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대한반도 전략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것은 동시에 이후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미국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변혁세력도 사실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 /강요배

미국의 대한반도 점령정책에 대한 남한민중의 항의와 투쟁이 '2·7구국투쟁' 등을 통하여 점차 가열되어 가는데, 미국은 특히 반미투쟁의 열기가 높고, 그 투쟁경험과 역량이 풍부한 제주 도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계속했다. 1948년 초에 이르러도 제주도에서는 도민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이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48년 4월 3일, 항쟁의 시작
1948년 4월 3일 자정, 드디어 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섬사람들의  남로당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00여 명과 이를 따르는 1,000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이를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했다.

왜 공격했는가. 무장대가 제주도민과 경찰관에게 보낸 2개의 '호소문'을 보자.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조선사람이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매국매족노를 거꾸러뜨려야 한다...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시민 동포들이여!..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반미통일구국투쟁으로 제주 4·3은 시작된 것이다. 외세를 몰아내 완전한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고난의 전투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군경토벌대가 제주 섬사람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초기 공격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각 면단위로 투철한 사상성 및 전투 경험을 소유한 사람을 30명씩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섬 전역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통행증제를 실시했다. 4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육지에서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급히 제주도로 배치했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경비대가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 을 계속 요구했다.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김익렬은 초토화 작전을 거부했다. 미군정은 작전수행이 불가능하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4.28평화협상에서 항쟁의 대표였던 김달삼이 경비대의 김익렬 중령에게 밝힌 4개항의 요구조건은 이렇다. 첫째, 단선단정 획책하는 미군철수, 둘째, 악질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철수, 셋째, 제주도민의 경찰편성까지 치안업무 경비대 수행, 넷째, 의거참여자의 전원 불문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깨졌다. 피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누가 깼는가. 협상 다음날 미군정장관 딘(W. Dean)이 내도하면서 평화협상을 일방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5월 I일 오전 12시 경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 명이 제주읍 외곽 오라리를 기습 공격했다. 12채의 민가가 불에 탔다. 이에 마을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과 맞붙었다. 청년들의 보고를 받은 경찰들이 즉각 출동하여 유격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쳤다.

이날 충돌과정에서 경찰관 가족 I명과 마을 주민 1명이 희생됐다. 경찰은 오후 4시 30분까지 마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심문하다가 김익렬 등의 국방경비대가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에서 철수했다. 이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오라리방화사건이 우익청년에 의해 자행됐다는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몰아 붙이는 조작을 감행했다. 그들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하여 보도조작을 요구했다. 사건 당시 오라리 상공을 정찰하면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여 '제주도의 5월 1일(May Day on Cheju-do)'이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5월 3일에는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 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귀순자 중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하는 사건 이 발생했다. 경찰은 처음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지만, 미군에 의해 체포된 괴한 중 1명이 제주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건을 경찰과 미군정, 그리고 경비대 사이의 이간질을 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유격대의 경찰 가장기습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이에 4·28평화협상과 이후 조작된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뒤집어 씌웠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용공으로 몰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대규모 초토화작전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5·10선거 거부투쟁과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5.10 단독선거를 반대해 산으로 피신해 임시 주거하는 모습.

이에 대응하여 인민유격대는 5·10선거가 다가오자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이 일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인사들이 살해됐고 각종 시설이 습격 당해 부서졌다. 제주도민들도 5·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했다. 많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선거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했고, 선거일이 되자 더욱 강화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했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10단선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이에 미국은 즉각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박진경에게 초토화작전을 명령했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았다. 6월 중순이 되면서 '포로' 의 숫자는 6천명으로 늘어났다. 한라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소하는 박진경의 강력한 투망식 토끼몰이식 공격은 도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광폭함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이전 도민의 호의적인 반응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박진경과 국방경비대의 이와 같은 강력한 토벌에 대응하여 유격대는 5월말 '인민해방군'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도민들 또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탐지, 감시하기 시작했다.

6월 18일 토벌 방식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등이 박진경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최경록을 그 후임 에 임명하여 박진경 암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한편, 도민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계속했다. 이어 7월 15일에는 송요찬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약 한달 동안 새로이 부대정비를 하게 한 다음 유격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토록 했다.

8월 초순, 김달삼, 강규찬 등 유격대 주요 지휘관 6명이 해주의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제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 정치일정으로 인하여 유격대는 장기항전 준비에 돌입했다. 경비대의 대유격대 진압작전 또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4·3 당시 군과 경찰에 끌려간 주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그러나 부대를 정비한 송요찬이 9월초부터 대유격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이우어졌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 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三盡) 작전이라는 천인공노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됐다.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

특히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여순 봉기를 진압한 10월 하순 이후에는 유격대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 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토벌작전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됐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했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기아 /강요배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지휘관 유재흥 대령, 참모장 함병선 중령)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했다. 

유재흥 대령은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펼쳤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 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됐다.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했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했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 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 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됐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됐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7년 7개월의 피의 장막은 내려지고
그러나 도민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뒤라 마을마다 다시 잡아들일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예비검속으로 마을마다 수백 명씩 전도 차원에서 수천명이 다시 희생됐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됐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 음을 기리고 있다. 모슬포 '백조일손' 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됐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잠들지 않는 섬 /강요배

제주 4·3의 진행 과정을 통해 제주도는 3만∼5만여 명 이상의 사망자 이외에도 지역 공동체 전체가 와해되는 피해를 입었다. 160여 개 마을 전체가 참화를 입었으며 불타거나 파괴된 가호가 15,228호, 피해 가옥이 35,921동에 이르렀다. 이재민 수는 당시 전체 인구의 35% 가량인 91,732명이라고 나타났으나 실제로는 인구의 절반인 1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4·3'의 후유증은 제주 지역 공동체의 파괴와 굴절로 이어졌다.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가던 지도층과 지식층 대다수가 희생됐고, 살아남아도 용공 혐의에 짓눌려 정신적인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엄청난 피해와 충격으로 공포에 가까운 피해의식이 체질화됐고 이로 인해 제주도민 전체의 의식과 삶이 오그라들었다. 특히 연좌제로 인한 피해도 최근까지 지속되어 왔다.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굴레로 인하여 공동체적인 정신문화가 파괴됐다. 그 이후 계속된 냉전과 분단을 배경으로 한 반공독재체제와 더불어 4·3을 침묵의 세월에 묻히게 했다.

국가테러리즘과 민중항쟁

미군정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38선 이남의 유일한 법적 정부였고, 따라서 미군정은 양민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또는 최종적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이후 이승만 친미정권에 의한 제주민중 학살은 결국 국가가 져야할 책임이다.

제주 4·3항쟁을 장기화 시킨 책임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있다. 제주 4·3은 이런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살아남기 위한 항쟁이었다. 제주 4·3항쟁이 발발하게 된 1차적 원인 제공자는 당연히 미군정이요, 이에 기생하고 있는 이승만을 앞세운 친미친일 잔존세력들이다.

제주 4·3은 국가테러 대 민중의 저항이라는 충돌구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선 전국 통제력을 점차 제주도에까지 확산시켰던 미군정은 그 동안 자신들의 자율적 공동체 질서를 구축해놓고 있었던 제주도인민위원회 및 민중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국가 폭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자행한 무자비한 탄압은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와는 거리가 당연히 멀다.

한마디로 국가 테러다. 이런 국가 테러에 제주 민중들은 자신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저항했다. 제주 4·3사건을 민중항쟁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될 것 같다.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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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주4.3연구소>,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4.3은 말한다>(제민일보)의 자료와 <미국의 한반도전략과 조선의 분단 : 4.3항쟁을 중심으로>(강정구, 전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제주4.3항쟁과 미군정정책>(정해구,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위원)의 논문을 기본텍스트로 삼았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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