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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삶에서 노동자 된 소녀 거친 손으로 세상을 알게 되다
학교도서관
2007.03.12.
5947
한겨레
에스페란사의 골짜기

때론 성장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굳이 사람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복잡한 우리들의 세상일에도 등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저 어린 아이의 눈처럼, 혹은 <광화사>에 나오는 눈먼 처녀의 눈처럼 삶의 복잡다난함을 모르고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나의 단단하고 굳어진 이런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삶을 슬기롭게 극복해온 사람들이었다.

<에스페란사의 골짜기>(아침이슬)는 지은이의 할머니가 1930년대 초 멕시코를 떠나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당시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에스페란사는 수천 에이커에 이르는 대농장의 딸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집에서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열세 번째 생일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 에스페란사는 엄마와 재혼하려는 삼촌을 피해 농장의 하인 미구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들은 기업 소유의 노동자 막사에 정착해 하루하루 품을 팔며 힘겨운 일상을 보내야 한다. 그러던 중 엄마를 덮친 무시무시한 열병은 에스페란사를 더 이상 어린 소녀로 있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 주던 엄마의 보호자가 돼야 한다. 아기 보기, 청소하기, 빨래하기부터 시작해서, 아스파라거스를 포장하고 감자의 눈 자르는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진다. 에스페란사는 파업 중에도 묵묵히 일에 매달리지만,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작업환경 개선 등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초라한 옷에 손은 거칠어졌을지 몰라도 눈빛과 정신만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성장해간다. 멕시코에서 온 공주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에스페란사는 스페인어로 ‘희망’을 뜻한다. 그녀는 깊은 골짜기의 밑바닥을 훑고, 씩씩하게 솟아오르는 봉우리처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소설은 이런 희망을 이야기하며, 인종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려내고 있다.

교사로서 나름의 깊은 골짜기에서 힘겨워하는 청소년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방황 중에 이유 없는 방황은 없다. 오늘도 수업중 기지개를 켜며 벌건 도장을 그린 얼굴 하나가 내 맘을 비집고 들어온다. 아이의 엇나간 말투에서 아이의 골짜기를 본다. 그리고 부드럽게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그 아이의 단단하고 굳어진 마음을 풀어주고, 삶을 강하게 부딪쳐 헤쳐 나갈 ‘희망’ 하나를 심어주고 싶다.

전미라/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모임 회원, 태릉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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